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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축구, 그 치열한 두뇌싸움의 역사 (by 메씨도나)
    2009. 4. 19. 21:04


    공과 기둥만 있으면 모든게 가능하다는 스포츠가 있다.이 단순한 스포츠는 여러가지 형태의 진화된 스포츠중 가장 많은 사람들의 환호와 열광을 받으며 불가사의할 정도로 아름답게 발전되어 왔다.물론 전쟁후 해방감에 적군의 해골을 차는 것에서 시작되었다는 재미있는 유래부터 예전 로마시대나 아시아,아랍쪽에서 그 기원을 찾는 경우도 있으나 축구에 태생에 관해서는 이미 여러가지 속설을 바탕으로 한 다양한 역사가 이미 나타나 있는 상태.역사적으로 큰 전쟁들을 일으킬 정도로 관중들의 흥분과 관심을 불러일으킨 축구라는 종목에 대해서 많은이들이 연구를 거듭하고 발전시켜 왔다는 사실은 어찌보면 굉장히 당연하다 느껴질 정도이다.

    초창기 축구는 모두가 알다시피 종주국 잉글랜드에서 시작되었고,축구협회(Association football, Association에서 중간 soc글자가 soccer의 기원이라는 설이 유력하다)라는 명칭으로 지금보다 한명 적은 10명에서 시작되었으며 골대는 정말 기둥 두개의 높이가 정해져 있지 않았고 규칙 또한 약소해 현시대의 팬들의 욕구를 만족시키기에 부족한점이 많았던게 사실이었다.물론 오프사이드,프리킥등 단순하게 필요한 룰들이 있긴 했으나 창조적이고 발전적인 축구의 두뇌싸움은 마치 인간의 지능의 한계를 시험하다시피 많은 변화와 유행을 타곤했다.

    우선 축구의 기원,의미나 룰은 제쳐놓도록 하자.지금 이글에 저 세가지 사항까지 포함된다면 하루종일 이야기를 풀어내도 모자랄테니.그러나 재미있게 짚어볼 가치가 있는것은 그런 기원에 이은 발전,계속되온 축구의 진화에 사람들의 연구와 두뇌싸움이 거듭되었다는 것이다.또 그 두뇌싸움의 발전을 통해 현재의 여러가지 전문적 사항이나 활약도가 좌지우지 되었다는 것만 봐도 이 단순하고도 최고로 단순한 '축구'란 스포츠가 외형과는 달리 엄청난 복잡함을 지닌 종목임을 증명하고 있다.


    <축구역사상 첫 경기였던 잉글랜드-스코틀랜드>

    축구의 첫경기를 기억하는가?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역사적인 첫경기는 득점이라는것이 나지 않은채 0-0의 스코어를 기록하고 종료되었다.현대 수비적인 축구의 다양한 발전을 암시했던 것일까.아니면 축구에서 공격의 필요성을 경고한 역사적인 결과였을까.결과적으로 축구는 지시를 통한 조직의 의미라는 것,머리를 굴려야 득점을 할수 있다는 것이 축구라는걸 본능적으로라도 깨닫아야 된다는 계시였을까.

    축구,각종 포메이션의 유행을 통한 지능적인 역사.
    한번 짚고 넘어가 보는것도 재미있는 일이 될것이다.





    1. 초창기 축구, "무조건 제쳐라" "아니다, 길게 운반해라"


    1863년 초창기 축구는 오프사이드라는 규정이 분명히 있었다.가끔씩 펠레의 활약 덕분에 오프사이드를 창시했다는 말도 떠돌던데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오프사이드가 단지 골라인을 패싱전에 넘느냐 마느냐로 판단하는 구식적인 방법이었을뿐,오프사이드 규칙은 축구가 생기자마자 적용됐다.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첫경기를 굳이 전술로 나누어보자면 1-2-7,2-2-6 이었다는데 아무리 오프사이드 규칙이 보수적이었다 하더라도 왜 이렇게 6명,7명의 공격수로도 골을 못넣었을까.

    재미 있는 사실은 초창기 축구에 "전진패스가 금지" 되었다는 사실이다.사커가 럭비에서 근원이 되었기 때문인데 그것을 제쳐두고서라도 그당시의 축구는 당연히 축구선수로서 패싱력이 필요하지 않았다.룰을 피하기 위해 단지 제쳐라.그냥 제치고 골문안으로 넣어라.전진패스가 없는 축구는 저런 포메이션으로도 골을 넣기가 상당히 힘들었고,당연히 재미를 반감시킨 이 룰은 3년만에 전진패스가 허용되는 것으로 변해있었다.그 이후 1870년대의 영국은 축구에 있어 "롱패스" 라는 개념을 처음 알게 되는데 공의 전진이 가능하니 효율적인 방법인 긴 패스에 이은 머리를 이용한 플레이,앞서 나가는 선수에게 빠르게 전달해주는 필요성이 이때 비로소 정착된것이라고 할수 있다.

    아,축구선수가 필요한 능력이 몇년도 안되어 생기고 말았다.바로 헤딩,패스,리시브(볼터치)능력.오프사이드라는 현대에 하나의 룰에 불과한 사항이 축구에 전술을 도입시키기에 충분한 요소를 갖추게 만든것이다.그럼 처음으로 전문적 명칭으로 자리잡은 전술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1. 2-3-5 피라미드 전술 (The pyramid system)


    잉글랜드는 축구를 하며 드디어 머리를 쓰기 시작했다.바로 5명의 공격수를 앞에 두면 상대는 5명의 수비수 이상을 두어야 할것이며,롱패스 능력을 갖추면 단 몇번의 패스로도 충분히 짧은시간안에 효율적인 골방향을 제시할수 있다는 생각을 했던 것이다.오늘날 많은 축구팀들에게 4-3-3 전술이 유행하고 있는데 이 2-3-5 전술은 현대의 4-3-3에서 양쪽 윙백이 오버래핑을 한 상황과 그 위치는 유사할 법하다.그러나 이때는 5명이 공격에만 전념했고 움직임이 많지 않았으며 "수비-운반-골"이라는 단순한 법칙만이 존재했다.긴 패스로 인한 럭비식 움직임이 대세였으며 선수들은 고정된 자세에서 볼운반을 중시한 어찌보면 지금보다도 기계적인 축구를 선보였다.여기서 "윙어(winger)'라는 존재의 중요성을 깨달았으며 정확한 패스가 골을 만들수 있다는 선수들의 개념이 더욱 정착되었다.당시 피라미드의 성과는 괜찮았지만 이런 운반에서 공격진에 뜻하지 않은 문제가 생기고 만다.이 문제를 일으킨것은 앞에도 언급한 '틀을 드디어 갖춘 오프사이드'의 적용이다.그러나 이 전술은 이런 약점에도 불구,진화를 거듭하며 1900년대 전반기를 지배할만큼 그 강력함을 유지했다.




    2. 아스날(Arsenal)의 레전드 허버트 채프먼(Herbert Chapman), W-M(The W-M formation)을 전파하다.


    아스날 클럽 역사상 가장 위대한 공적을 세운 인물은 누구일까.여러 선수들과 많은 감독이 거쳐간 아스날이라는 잉글랜드 빅클럽에서 그런 인물을 찾아내기는 어렵지 않다.그러나 정말 무엇을 창시한 레전드를 꼽아보자면 전문가들은 이 채프먼을 돋보적으로 꼽기를 주저하지 않는다.아스날 팬들에게는 낯설지 않은 이 이름은 현재에도 각종 팀내 관련 시상식에서 그의 동상이 많이 조명받고 있는 상태이며 이 세필드출신의 채프먼이 아스날뿐 아닌 축구계에 남긴 위대한 공적은 바로 W-M 포메이션의 도입이다.흔히들 W-M 포메이션을 1950년대 전설의 헝가리 대표팀이 먼저 구사한 것으로 알고 있는 경우가 많은데 사실 이 포메이션은 리즈 유나이티드를 거쳐 하이버리에 입성한 이 동그란 얼굴의 중년신사가 만들어낸 걸작품이다.그렇다면 왜 그는 저런 대형을 생각했을까.


    <W-M formation>

    1925년에는 오프사이드가 개정되었다.지금의 오프사이드와 틀이 유사한 공격수가 수비수보다 먼저 앞으로 들어가면 안된다는 엄연히 공격을 제한한 룰이었다.그러나 이것은 공격의 제한을 목적으로 둔게 절대 아니었다.오히려 공격의 활성화,수비로부터 자유로운 공간의 한 방편을 마련해 주었다는데 그 목적을 두었고 각종 연구끝에 나온 이 룰의 개정은 화끈한 공격축구의 활로를 열어주기에 충분했다.프리미어 리그 1925시즌 1192골의 총 리그득점은 1926시즌에 들어 무려 40%가 증가한 1703골이 났고,이유는 당연히 전방 공격수의 침투를 용이하게 만든 이 오프사이드룰 때문이었다.호프먼은 당시 2-3-5 포메이션의 절대적 유행을 뒤로하고(* 사실 피라미드 2-3-5 전술은 채프먼이 사망한 1930년대까지 월드컵의 많은팀이 소화할 정도로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었다) 최전방 공격수의 디펜싱을 조금이라도 강조하는 쓰리백을 선보였다.이 쓰리백의 역할은 철저한 수비였고 좀처럼 나오지 않는 상태에서 전방 공격수를 철저하게 맨마킹 하는 역할을 수행하였다.

    그러나 채프먼의 공적은 쓰리백뿐이 아니었다.그가 창조한것은 그동안의 축구가 미들진에게 단순한 볼운반을 요구했던것에 비해 "피보테"의 개념을 미들진에게 심어주었다는 점이다.물론 지금같이 전문적인 형태는 아니었지만 이 두명의 수비형 미드필더는 협력수비라는 개념을 겉으로나마 수비 공간에 보여주었고 더욱 효율적이게 오프사이드를 돌파하려는 최전방 공격수를 마킹할수 있었다.당시 스트라이커 침투의 중요성을 강조한 스코틀랜드의 알렉스 제임스경의 '포워드 중시축구'는 채프먼의 W진영에 의해 그 시기가 얼마 안가 소멸되고 말았다.또한 호프먼은 M자에서의 미들필더들에게 게임을 만들어내라는 역할을 분배했다.기존의 5명의 전방공격수중 2명을 뒤에 배치,굳이 따지자면 초창기의 플레이메이커론이라고 할수 있는데 이런 만들어 나가는 플레이의 영향력은 위대했다.


    채프먼이 사망한 1934년에도 그가 감독 생활중 아스날에 남겨준 W-M은 그 위력을 발휘,1927년에서 1938년까지 5번의 리그 챔피언쉽 우승과 2번의 FA컵 우승을 팀에게 안겨준다.곧 모든 잉글랜드 클럽은 W-M을 도입하게 되고 이 유행은 좀처럼 식지 않았다.이는 1930년 첫 월드컵에서도 그 영향력을 지대하게 미쳤는데 당시 헝가리 오스트리아 남미의 국가들은 이 W-M포메이션을 도입해 당시 5명 공격의 극단적인 움직임들을 변화시켰다.공격축구를 극대화시키는 2-3-5 포메이션을 믿고 있는 당시의 분위기에서 W-M의 도입에 마찰이 생긴것은 당연했는데 당시 우루과이 레프트백이었던 어니스토 마스체로니는 "무엇을 위해 이걸 지시하는 겁니까?오직 선수만이 필드 경기에서 문제를 해결할수 있습니다"라는 발언으로 한차례 그 논란을 만들기도 하였다.그러나 마스체로니의 걱정은 기우에 불과했다.당시 우루과이 대표팀은 가장 뛰어난 축구로 월드컵 첫대회에서 역사적인 우승을 거머쥐었으니.단지 선수의 능력이 경기를 이길수 있다는 생각을 버리게 만든것도 이 채프먼의 전술이었다.

    <포쵸 감독의 다뉴비안 사커>

    그 이후에 1934년 이탈리아 월드컵에서는 포쵸(pozzo) 감독의 이탈리아가 "다뉴비안 사커(Danubian soccer)"를 유행시키며 우승했는데 당시 다뉴비안 사커를 보면 W-M 포메이션이 아닌 기존의 2-3-5 포메이션을 다시 시도했다는 점이 흥미롭다.그러나 현재까지 이탈리아의 당시 축구를 W-M 포메이션의 연장선으로 분류하는 이유는 이탈리아가 5명 공격진을 M포메이션을 인용해 성공을 거둔 사례였기 때문이다.뒤에 말할 헝가리의 막강사커도 W-M 포메이션의 성공을 기반으로 둔것인데 단지 채프먼은 뛰어난 감독,훌륭한 감독이라는 표현이 모자랄 정도이다.오히려 위대한 축구계의 창시자라 불려도 과한 말이 아닐지 모르겠다.어쨌든 이 피라미드와 W-M을 절묘하게 섞어놓은 다뉴비안 사커는 전세계에 빠르게 유행되고 정착될 정도로 당시 그 위상을 실감했다.그러나 바뀌지 않는건 채프먼,그의 바탕은 다뉴비안 전술과 함께 축구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는것,축구계의 변하지 않는 그리고 영원한 사실일 것이다.

    <채프먼의 W-M은 영원히 존경받을 것이다>




    3. 수비 시스템의 선구자, 칼 라판(Karl Rappan)의 스위스 볼트(Swissbolt)

    <스위스의 칼라판 감독>

    가끔씩 우리가 오해하는 부분이 있다.바로 1930년대에서 70년대까지의 축구는 전개측면이 제한되는 4-6,6-4등의 포메이션이라 불리기도 뭐한 단순한 배치형태로 경기를 지배했다는 생각인데 이것은 여태까지의 축구를 발전시켜온 감독들에게 실례가 되는 말일뿐더러 사실 또한 아니다.축구는 변화되어 왔다기보다 진화되어 왔다는게 더 맞는 표현일 것이며,각 뛰어난 감독들의 공적은 선구자들의 바탕을 응용한 전술적 책략을 드러내는 경우가 많았다.


    <당시 스위스팀의 공격시 포메이션>

    크루이프의 위치선정과 공간을 중시한 토탈사커의 조직수비는 그 가치를 현재까지 인정받고 있다.그렇다면 그 수비와 공간을 앞서 제시해준 전술은 무엇이었을까?바로 오스트리아 출신 칼 라판 스위스대표팀 감독은 수비시스템을 가장 돋보이게 창조한 감독이라고 할만하다.이 감독의 3-3-4 전술은 크루이프의 토탈사커와 닮은점을 쉽게 발견할수 있는데 당시 스위스 대표팀은 공격시에 모든선수들이 공격에 가담했으며 3명의 중앙수비수는 계속 공격진으로 들어오면서 전원공격의 형태를 처음으로 보여주었다는 점으로 그 닮은점을 찾아낼수 있다.


    <극단적이라 할만큼 공수의 변화가 많았기에 빠른 움직임과 선수들의 체력이 요구됐다>

    그들의 수비는 공격 당시 진영으로 보면 놀랍다고 할수 있을정도로 철저하게 하프라인 안으로 들어와 있었다.당시 칼 라판 감독은 공의 포제션이 밀린다고 판단이 되면 모든 선수들이 스스로 하프라인 깊숙히 내려와 전원수비를 하는것을 지시했으며,당연히 이런 빠른 공수전환은 모든 선수들의 강인한 체력이 필수적으로 따라주어야 했다.물론 당시에는 명칭대로 번개같은 움직임의 전선수의 공존화가 많은 성공을 안겨줬지만 양하프 미들진의 체력이 부실할 경우 좌우 윙에서 움직이는 선수들이 고립되는 성향이 강했고,공격진의 숫자가 4명과 5명으로 들쑥날쑥하게 움직였다는데 그 한계를 드러내고 만다.가장 근본적인 문제였던 것이 공수간격인데 토탈사커와 달리 당시 이런 공간적 간격을 유지하는 움직임을 몰랐던 시기였고 넓은 간격으로 공을 길게 뿌리는 팀들에게 좁은 공간을 유지하는 그 약점을 스스로 알려주는 꼴이 되었다.

    그러나 당시 스위스가 꾸준한 활약을 보일수 있던것에 이 '베로우'라고도 불리는 '스위스볼트 전술'이 최대의 역할을 하였고,인사이드 포워드(inside forward)의 존재와 양쪽에 윙 하프(wing-half)의 전술적 요소를 추가해준 축구계의 고마운 전술중 하나이다.한가지 덧붙이자면 축구에서 체력이 안겨주는 절대적인 영향과 좌우 사이드에서 얼마든지 효율적인 공격의 방향을 제시해줄수 있다는 점은 칼 라판의 공적이 그 역할을 해주었다고 할수 있다.


    <브라질의 당시 축구는 스위스와 유사하나 피보테의 수비적 위치가 더욱 확고하다>

    당시의 브라질은 우루과이에 밀려 아깝게 준우승에 머무르고 말았지만 스위스볼트를 토너먼트에서 응용한 그들만의 독특한 3-3-4 방식으로 좋은 공격력을 펼친 케이스이다.당시 멕시코를 4-0으로 초토화시킨 경기는 이 브라질만의 응용전술이 가장 잘 드러난 경기였는데 중앙 미드필더를 수비적으로 움직이고 앞의 센트럴 미드필더들의 빠른 전개로 아데미르,발타자르,치코등이 포진한 막강 공격진의 공격력을 극대화 시켰다.물론 저당시의 브라질 포메이션을 70년 브라질의 전성기를 만든 4-2-4의 초반 형태라고 보는 전문가들 또한 많으나 당시 브라질이 스위스의 빠른 공격전개를 도입해 펼친 월드컵 또한 스페인을 6-0,7-1로 가볍게 물리칠 정도로 그 화려함을 과시했다.또한 당시 3-3-4 브라질은 현대의 공격적인 4-3-3의 운용에서 그 많은 유사성이 있다고 평가를 받고있다.





    2. 전술의 진화, 게임을 풀어가는 포지션 개념을 만들다


    전술의 바탕에서 중요한 것중 하나는 역할분담이다.물론 현대축구로 접어들어 모든 선수들이 각자의 위치를 지켜 자신들의 역할을 평등한 상태로 유지하자는 토탈사커가 센세이션을 일으켜 포지션의 분배에 대한 선을 불분명하게 만들어 놓은게 사실이지만,그렇다고 해도 각자의 포지션에서 활약하는 선수에게 자신의 독특한 역할을 전달하는 과정은 지속되고 있는 현실이다.위의 세개의 전술이 선수들의 배치에 의한 전개적 방향을 제시해 주었다고 하면 이제부터의 전술들은 드디어 선수들의 특성을 최대한 활용할수 있는 진정한 두뇌축구의 시기를 맞이하게 만든 전술들이라 할수 있다.

    감독들이 각각의 포지션에서 어떤 역할을 펼칠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것은 전술적 발전에 상당한 기여를 했으며 전문적인 전술을 창시하고 외칠때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포지션에 대한 용어들 (* 물론 그렇게 현재 논란이 일고있는 홀딩과 앵커까지도) 이 정착되기 시작됐다.또 이것으로 인해 포지션 선수들에 대한 가치와 몸값은 조금씩 벌어지거나 줄어들거나를 반복하며 변화하기 시작했다.




    1. 매직 마자르(magic Magyar)의 빈공간의 축구, 오십년대를 지배하다


    1950년대 초반 46전 40승 6무.독일에서 월드컵에서 역전을 당할때까지 46경기에서 단 1초도 리드를 내주지 않았던 마술같은 축구팀.그들을 사람들은 매직 마자르(magic Magyar)라고 칭했다.당시 콧대 높던 잉글랜드 대표팀에게 웸블리에서 치욕을 안겨준적도 있는 1950년대 헝가리 대표팀은 그 전성기가 짧았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에게 마술같은 축구를 보여주었다는 인식을 아직까지 심어주고 있다.그렇다면 그들의 막강한 힘은 어디서 나왔을까.헝가리는 아까 이미 소개한 W-M 포메이션의 영향을 받은뒤로 쭉 같은 형태의 포메이션을 고수한 나라중에 하나다.겉만 보면 변화가 없을듯한 매직 마자르였지만 그들에게 1950년대 들어온 두명의 보석이 있었다.바로 구스타보 세베스(Gustav Sebes) 감독과 새로운 포워드 유형선수의 첫신호를 쏘아올린 히데구티(Hidegkuti)였다.


    <히데구티(左)와 세베스 구스타보(右)>

    세베스 감독은 공격 공간(attacking space)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만들어낸 사람이다.그의 공격은 수비진을 유린하는 3명의 포워드의 월패스가 수비수를 모아놓게 하고 다른 1명의 여유 공격수를 자유롭게 만든다는 어찌보면 단순한 방식이었다.별거 아닌듯한 이 방식의 독특한 점은 바로 최전방의 중앙을 맡고 있는 선수가 뒤로 빠지며 삼각편대를 양쪽의 선수들과 이루어낸다는 것인데 이것은 지금 사용되고 있는 4-3-1-2 공격편대의 방향을 제시했다고 할수 있다.


    <히데구티의 처진 중앙에서의 공격전개>

    곧 의미적으로 '현대에서 쉐도우 스트라이커라고 불리는 유형의 탄생'이라 정의내릴수 있다.헝가리 대표팀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푸스카스라는 존재는 아직도 전세계의 레전드로 추앙받고 있지만,그에 가려진 히데구티는 그당시 위대한 푸스카스를 든든히 보좌하던 헝가리의 주춧대라고 할수 있다.당시 전술적 판단이 빠르고 그 쉐도우적 역할을 수행한 선수는 푸스카스가 아니라 바로 이 히데구티였고,그의 공간을 찾아들어가는 움직임은 당시 헝가리의 강력한 공격진을 이끌곤 했다.

    당시 잉글랜드 대표팀을 웸블리에서 제압한 경기는 헝가리의 위대한 경기중 하나이다.축구에 있어서 끝없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던 잉글랜드는 그 어느곳보다 신성한 웸블리에서 헝가리 대표팀을 상대하는데 자신감을 보이고 있었다.뚜껑을 열어보니 너무 싱거운 한판.당시 헝가리와 경기를 치룬 잉글랜드의 미드필더 존스톤(johnston)은 하프타임때 내가 마크할 헝가리 선수가 누구인지 모르겠다는 말을 할 정도였다.히데구티의 공간은 항상 비어있었고,그것을 극복하려 미들진이 달려가면 중앙이 비었으며 중앙으로 달려들면 푸스카스가 이끄는 사이드에 처진 스트라이커들이 위협적인 모습을 만들어냈다.영국은 이런 참패에도 불구 롱패싱 전술에만 의존하는 변화없는 모습으로 얼마 후 벌어진 부다페스트 경기에서도 7-1로 헝가리에게 허무하게 무너지고 만다.


    <한명의 여유를 만들어내는 헝가리 전술>

    "빈공간을 이용하는 축구"의 승리가 펼쳐지는 순간이었다.헝가리는 웸블리에서 잉글랜드에게 6-3으로 승리했으며 히데구티는 이런 전술적 혼란을 겪는 잉글랜드 미들진을 교란하며 해트트릭을 쏘아올린다.매직 마자르의 수비진형 또한 전형적인 W진영에서 공격선수를 압박하는 개념을 안겨줬다.그들의 수비는 쓰리백의 형태를 띄웠지만 피보테 개념의 앞의 미드필더의 끊임없는 협력수비로 한명의 수비수가 여유로운 상태를 만들며 수비시의 약점을 최소화시켰다.어찌 보면 초창기 포백을 이 헝가리 수비진이 만들었다고 해도 큰 무리가 없을정도로 네명이 막는 수비는 막강한 공격력을 받쳐주는 헝가리만의 무기가 되었다.


    <헝가리 전술은 좌우의 스트라이커를 중앙의 스트라이커가 이용하는 전술>

    헝가리가 주도하는 매직마자르의 전술 또한 타팀들의 벤치마킹이 되기에 충분했다.이런 빈공간을 이용해 움직인다는 개념은 공격적인 요소를 더욱 강하게 부각시키며 1954년 스위스 월드컵에서 경기당 5.36골이 터지는데 한몫을 담당했다.독일에게 패할때까지 헝가리는 정말 무적의 행진을 이어갔으며 당시 월드컵에서 독일에게의 패배도 그 하루전 헝가리의 숙박시설 근처에서의 카니발 행사,시끄러운 잡음을 일으키는 소동까지 겹치며 헝가리 선수들이 피곤에 쌓인 결과였기에 그들의 축구가 죽었다는 말을 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물론 헤펜베르거의 불멸의 명언 "공을 둥글다"의 발언과 그에게 힘을 얻은 독일선수들의 포기하지 않는 불굴의 정신력이 경기결과에 중요한 영향 또한 미쳤으나 헝가리는 이미 독일과 같은 월드컵대회 예선에서 만나 8-3의 승리를 벌였을 정도로 월드컵에서 누구나 예측가능한 우승후보 1순위였으니.그래서 그들의 축구는 짧았다.승리의 순간이 너무나 강렬했으므로.




    2. 브라질, 포백 시스템과 함께 공격의 날개를 피다


    우리들은 현대축구에서 포메이션을 지칭할때,숫자의 의미로 선수들의 배치를 쉽게 알아보려 하는 행동에 이미 익숙해져 있다.위에 나온 포메이션이 숫자로 안불려졌음에도 필자가 3-3-4 2-3-5등으로 지칭하는 것은 모든 관중들이 이미 숫자로 모든 포메이션을 설명할수 있다와 같은 맥락이라 볼수 있는데 현재 불리워 지는 모든 축구 포메이션중 가장 먼저 숫자로 불리워진것은 사실 브라질의 '4-2-4 전술'이다.4-2-4 전술은 브라질에서 전성기를 맞이한만큼 1950년 브라질 대표팀의 감독인 플라비오 코스타(Flávio Costa)가 들여온 전술이었다.


    <브라질의 1958년 월드컵 멤버>

    당시 최고로 공격적인 마인드의 축구를 펼쳤다는 평을 듣고 있는 브라질이 이 포백전술을 도입한건 지역적인 공간을 자주 내주던 공격축구의 흐름에 오히려 한명의 수비수를 늘려 수비적인 안정감을 줄수 있다는 계산 때문이었다.먼훗날인 1970년 월드컵에서 역대 최고의 공격팀이란 칭호를 받은 브라질에게 결과적으로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수 없는데,오히려 공격일변도로 흘러가던 4-2-4는 브라질은 4-4-2의 창시자 텔레 산타나(Tele Santana)가 현재에도 전술적 가치가 다분히 존재하는 '존 디펜스(zone defense)'를 정착시킬때까지 이런 극단적 공격방식을 꾸준히 이어왔다.그러나 브라질이 공격만을 중시하는 전술을 구사한건 아니었다.1958년 당시 4-2-4 또한 공격 일변도시 수비의 부담을 최소화 시켰다는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그러고 1958년의 브라질대표팀 또한 텔레 산타나같이 자신이 맡은 존을 수비한다는 개념을 충분히 가지고 있었다.브라질이 4-2-4에서 미들진의 부족을 메꿀수 있던것은 바로 포백중 양쪽윙백의 오버래핑과 활동량,사이드의 수비적 부담감을 덜어주는 움직임과 당시 천재윙이었던 가린샤와 자갈로의 존재 때문이었다.그중에서 개인기가 받쳐주는 양쪽 윙과 수비와 공격을 넘나드는 오버래핑의 개념을 축구계에 선사한 양쪽 풀백의 움직임은 당시 브라질 전력의 핵심이라 할수 있다.



    브라질은 공격시 사이드론을 제일먼저 완성한 최고의 팀임이 확실하다.그들의 사이드 공격은 역대 최고의 재능 펠레를 더욱 부각시켜준 원인이 되었으며,브라질의 마리오 자갈로(Mario Zagallo)감독은 수비시에는 투톱중 한명인 바바(Vava)를 미들진으로 내려 4-3-3의 형태를 갖추어 미들진의 부족을 메꿨다.흥미로운건 전방에 딱히 역할 분담이 없던 스트라이커라는 존재가 두명씩(투톱 시스템) 공존할수도 있다는 해답을 브라질 대표팀이 주었다는 점이고,이팀은 월드컵 9전전승의 기록과 함께 당시 최고의 레전드들을 배출해낸 한시대를 휩쓴 대표팀중 하나였다.

    사이드 공격과 함께 윙백의 수비 개념을 실어넣은것도 이 브라질의 4-2-4전술이다.예전 쓰리백에서 중앙수비수가 사이드로 들어오는 상대 공격선수를 마크하기위해 뛰어들어가야 하는 불편함이 존재했고,포백의 브라질은 당시 양사이드에 들어오는 윙어를 오버래핑을 한 윙백들이 철저하게 맨마킹해주는 모습까지 안겨주었다.물론 그들의 개인기와 축구센스는 이미 가장 환상적인 구상으로 경기를 치루는 조건을 만들어 주었지만,이런 안정된 포백 시스템에 이은 공격시의 사이드 플레이가 당시 브라질을 가장 아름다운팀(The beautiful team)이란 찬사를 받게 하는데 일조했다.


    4-3-3 또한 당시 브라질에 대항하기 위해 다른 국가대표팀들이 정착시킨 전술이라고 할수 있는데 미드필더의 숫자개념(one up, two back ; two up, one back)과 함께 미드필더진의 중요성을 부각시킨 축구계에서 의미적으로 중요한 전술이라 할수 있다.물론 현재의 4-3-3과는 그 기반이 틀리지만 투톱을 두명의 중앙수비수가 안정적이게 맨마킹을 할수 있다는 가정하에 미드필더의 힘싸움에서 우위가 생길수 있다는 다른팀들의 고도의 책략이었으며 이 또한 현재의 형태로 발전되온 전술적 요소중 하나이다.

    펠레와 가린샤의 브라질,전술뿐 아니라 축구계를 변화시킨 그들은 역사상 가장 빛나는 축구팀으로 기록될 것이다.




    3. 공격을 막자, 잉글랜드의 윙없는 기적&이탈리아의 카테나치오


    브라질의 공격이 축구계를 휩쓸자 각 대회의 유럽팀들은 이런 공격이 강력한 축구의 대비책으로 강력한 수비전술을 구상하고 있었다.잉글랜드의 1966년 포메이션을 두고 '윙없는 4-4-2(흔히 말하는 다이아몬드 시스템)'라고 일반적으로 표현하고 있지만 당시에는 4-3-3으로 표기되는 경우가 많았다.당시 잉글랜드는 윙이 없는 전술로 대회 우승을 거머쥐었는데 최고의 책략가 렘지(Ramsey)감독은 이를 두고 '스위칭 시스템의 성공'이라 칭하였다.


    <윙이 없는 1966년 잉글랜드의 4-4-2>

    우리가 현재 쓰는 스위칭의 개념이 4-4-2에서 출발했다는 사실은 조금 의외가 될수도 있다.초창기 브라질 투톱의 움직임은 미드필더와 공격진을 오가는 단순한 포지션 변경 시스템에 불과했고,대회가 끝나고 잉글랜드는 '윙없는 기적'이라는 찬사와 함께 가장 스위칭 시스템을 전술에 녹여냈다는 평가를 듣고 있다. 다른말로 펭귄 포메이션(penguin formation)이라 불리던 이 전술은 미들진 양사이드에서 수시로 스위칭을 시도해 상대를 무력화 시키는 축구로 계속 거듭된 발전을 했고,이것은 현재 미드필더에게 가장 중시되는 활동량을 부각시키는 결과로 이어졌다.


    <당시 찬사를 듣던 잉글랜드 미들진의 운용,여러 방향성을 전제로한 움직임이 돋보인다>

    당시 헌트,허스트 투톱 시스템은 이런 꾸준한 활동량과 무브먼트로 다양한 방향성을 제시하는 4명의 다이아몬드 미들진에게 지원사격을 받았으며 브라질 4-2-4 시스템과 달리 잉글랜드 전통의 '미들진으로부터의 롱패싱' 전략으로 공수 양면에서 빠른 축구의 전개를 가져왔다.1960년대에 보여진 잉글랜드의 위상은 축구종주국의 체면을 다시 살려주는 치밀하고도 철저한 전술축구였으며,이런 중앙 미드필더 포지셔닝의 효율적 배치를 위한 방향을 현대축구에 가르쳐준 명전술이라 표현할수 있다.

    1970년 당시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하던 4-2-4 브라질에게 안타까운 패배를 당했지만 이때의 잉글랜드는 우승당시보다 더 큰 기대를 받은 대표팀중 하나였고 경기외적의 요소들이 동일하다는 전제조건하에서는 브라질을 꺽을수 있는 가장 강력한 후보중 하나였기도 했다.결국 브라질에게 왕좌를 내주고 말았지만 이들의 4-4-2는 많은 팀들에게 그 귀감이 되기에 충분했다.


    <네리오 로코 감독>

    잉글랜드가 중원을 두터운 활동량으로 해결하면서 수비의 해결책을 찾았다면,이탈리아의 노골적인 수비전술인 카테나치오(우리식 표현 빗장수비)는 한명의 리베로(free man)를 두어 더욱 강력한 수비진을 구축하는 1960년 유행 트랜드중 하나라고 볼수 있다.사실 카테나치오는 1947년 이탈리아의 U.S 트리에스티나(US Triestina Calcio)의 네레오 로코(Nereo Rocco)감독이 당시 팀의 수비진 구상에 머리를 싸매다 창시한 전술이자 인터밀란이 후에 도입하여 확연하게 완성한 전술로,얼마 지나지 않아 이탈리아 리그의 트랜드로 급속히 퍼진 케이스인다.


    <이탈리아의 카테나치오>

    자유로운 후방 프리롤개념의 리베로라는 위치는 팀수비는 물론 역습시 공격전개까지 두루 큰 도움을 주었고 당시 이탈리아를 무적의 수비군단으로 만들어준 카테나치오의 핵심적 포지션이라 할수 있다.카테나치오를 들고나온 각종 세리에의 빅클럽들은 "이기지 않아도 된다,그러나 지지는 않는다"라는 이념으로 득점을 안내주는 형태의 전술이 쉽게 이길수 있는 지름길이라는 사실을 가장 잘 표현해 주었고,이탈리아 대표팀 역시 전원이 깊숙히 들어온 것을 이용해 엄청난 체력의 소유자인 미드필더를 중앙에 배치시켜 쉬운 역습형태를 취하여 승리를 거머쥐었다.




    3. Tactical trends, 두뇌싸움들은 지속된다


    물론 이후에 크루이프가 공간의 개념을 도입하여 완성시킨 네덜란드의 토탈사커(total soccer),아리고 사키의 프레싱(pressing)을 바탕으로 한 AC밀란의 아름다운 축구가 축구계에 커다란 한획을 그었지만,이 전술들은 오늘날에도 그 배치만 다를뿐 각종 전술들에 효과적으로 녹아나고 있는 현재진행형이라고 봐도 무방하며 앞선 전술들 같이 선구자적인 방향을 제시한 것보다는 '창조보다 더 값진 재창조'를 이룩한 사항이기에 생략한다.

    축구에서 유행적 흐름이 계속될수록 이런 감독들의 두뇌의 결과물인 전술이 축구계에 끼친 영향은 점점 커지고 있다.예를 들어 풀백과 윙백이라는 개념이 탄생하면 그 자리를 소화하는 선수들의 수요와 공급이 각각의 팀마다 달라지고,각 포지션 선수들의 위상도 전술적 흐름에 따라 정해지기 마련이다.프랑스의 4-3-3,브라질의 4-2-2-2,독일의 3-5-2등 여러 전술의 변화와 완성은 아직도 끝없는 발전을 거듭하고 있다.(최근의 흐름으로 들면 "수비형 미드필더"가 미들진에서 어느 자리보다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게 될거란 예상이 나오고 있다)분명한것은 축구는 계속 진화해 왔으며 그 안의 선수들은 희노애락을 느끼는 동시에 팬들에게 즐거움을 주고 있다는 점이다.

    현대의 전술도 여러가지 유행의 흐름에 따라 여러가지 숫자싸움,공간싸움,압박싸움으로 더 화려하게 성장하고 있으며 이런 축구계의 트랜드가 지금의 형태에서 멈출지,앞으로 더욱 성장한 전술이 기다리고 있을지는 축구계를 이끌고 있는 그들의 손에 달려있다.축구 연구자이자 교수인 John Bluem씨의 '요새 펼쳐지고 있는 각종 전술에 대한 장단점 코멘트'를 마지막으로 글을 마칠까 한다.






    최근 대표적인 세가지 전술의 장단점 (John Bluem, Ohio State University)





    4-4-2의 장점

    1. 수직으로 양쪽 필드의 선수들의 밸런스를 맞추기가 쉽다
    2. 4명의 미드필더들이 포워드들에게 공을 주기가 용이하다
    3. 2명의 전방공격수가 중앙 방향으로 움직이기 편하다
    4. 팀 전체적인 공수를 쉽게 바꿀수 있다
    5. 공뒤에 8명의 수비수가 즉시배치 가능하다
    6. 균형이 깨지지 않는다
    7. 높은 압박을 유지할수 있다


    4-4-2의 단점

    1. 3-5-2에 대항하기 미들진의 숫자가 부족하다
    2. 투톱의 호흡을 조화롭게 만들기 까다롭다
    3. 미들필더의 밸런스가 깨지면 카운터 어택을 허용할수 있다
    4. 패싱이 안좋을시 포워드가 고립될수 있다






    3-5-2의 장점

    1. 창조적인 미드필더의 장점구사가 용이하다
    2. 미들필더가 수적으로 유리하다
    3. 스트라이커가 서포트를 받기가 더욱 쉽다
    4. 미드필더가 변환되어 위치를 바꾸는 것이 가능하다
    5. 각자 할당된 맨마킹을 하기가 쉽다
    6. 미들진을 점령하면 두려울정도의 카운터 어택을 사용할수 있다
    7. 우회적인 플레이가 가능하다


    3-5-2의 단점

    1. 터무니없는 측면 공간을 상대에게 내준다
    2. 직선적인 전술을 상대가 들고나올시 압박이 어려워진다
    3. 상대가 만들어낸 뒷공간을 제어하기 어렵다
    4. 소수의 선수들이 수비커버를 해야하며 밸런스 유지에 어려움을 겪는다






    4-3-3/3-4-3의 장점

    1. 앞선에서 볼을 따내기가 쉽다
    2. 3톱이 2톱보다 약간이나마 공격력에 도움을 준다
    3. 결정적인 공간을 공격진이 쉽게 만들어낼수 있다
    4. 공수간격을 보증할수 있다
    5. 상대공격에 대한 압박을 할당할수 있다
    6. 강력한 압박을 상대에게 구사할수 있다
    7. 상대에 따른 공격 빈도를 조절하기 쉽다


    4-3-3/3-4-3의 단점

    1. 3명의 공격수의 활약이 게임을 지게 만들수 있다
    2. 3명의 공격수에게 많은 공격량이 쥐어진다
    3. 상대보다 미들진의 숫자가 적다
    4. 수비를 최대로 가동하면 타전술보다 1명적은 7명의 수비가 가능하다



    Written by 메씨도나
    출처 : 싸커라인 (원문 보기)



    정말 좋은 글이라 나도 두고두고 보고, 다른 분들께 소개도 하고 싶어서 옮겨 왔음.
    여러분! 축구는 단순한 공차기가 아니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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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c itur ad astra.